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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MEMO/단어vocabulary

덩샤오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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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등소평


정치인, 혁명가


1904년~1997년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해 중국을 경제 강국으로 만드는데 디딤돌 역할을 했다.


항일전쟁(抗日戰爭)과 해방전쟁(解放戰爭)에 참가하였고, 공산당과 군대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아서 성실하게 임무를 다했다.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개국 원로로 추앙받고 있다. 관련 저서로 《둥소평문선(鄧小平文選)》이 있다.


초기

덩샤오핑은 항일 무장투쟁부터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과 대장정을 함께한 중국 공산당의 핵심 인물이다. 

1933년(30살)부터는 마오쩌둥을 지지하면서 대장정에 참여했다.



한 일

그는 항일전 내내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에서 정치위원을 지냈고, 1949년 장강 도하 작전과 난징 점령을 지휘하여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수립에 공을 세웠다. 1952년 정무원 부총리, 1954년 당중앙위원회 비서장, 1955년에는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이후 마오쩌둥의 총애를 받으면서 정치인으로서 급성장했다. 그러나 그가 진정 빛났던 시기는 마오쩌둥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이 혼란에 빠지고부터다. 그는 이때부터 중국을 경제 대국으로 이끄는 디딤돌이자 징검다리가 됐다.



시장경제에 대한 구상은 그를 10년간이나 고립시켰던 문화대혁명으로부터 기인했다.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 실패 후, 정권에 불안감을 느낀 마오쩌둥은 부인인 강청을 필두로 하는 사인방과 홍위병을 앞세워 정적을 무자비하게 제거하는 극좌 운동을 벌였다. 당시 참신한 정치 개혁 세력으로 떠오르던 덩샤오핑은 하루아침에 모든 권력을 잃고, 유배지에서 연금 상태로 지내야 했다. 대학생이었던 덩샤오핑의 아들은 홍위병 학우들에게 아버지의 잘못을 인정하라는 고문에 시달리다 창문에서 뛰어내려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게 된다.


덩샤오핑이 가장 빛난 시점은 바로 홍콩 반환 시점이 돌아올 때였다. 영국은 자본주의 홍콩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면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면서, 영토는 반환하되 홍콩에 대한 관리는 자신들에게 맡겨달라며 중국 정부에 중재안을 냈다. 이때 덩샤오핑은 단호하면서도 유연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결과적으로 홍콩은 무사히 중국 땅이 되었다.

이때 덩샤오핑은 ”1997년 7월 1일, 반드시 홍콩을 돌려받을 것이다. 그것이 주권국가로서의 할 일이다. 만약 그것이 안 된다면 인민들은 우리 지도자들에게 등을 돌릴 것이다. 단, 홍콩은 자체의 자본주의를 유지하고, 우리는 우리들의 사회주의를 실시할 것이다. 당신들은 돌아가서 투자자들을 안심시켜라.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한 나라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상반된 두 체제를 유지한다는 것이 덩샤오핑의 구상, 즉 ‘일국양제’이다.




21세기 경제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지금의 중국을 이끈 지도자는 중국 공산당의 아버지 마오쩌둥이 아니라 덩샤오핑이다. 마오쩌둥이 사회주의 지도자로서 인민의 나라를 만들었다면, 덩샤오핑은 인민의 나라를 부자 국가로 만들었다. 그는 ‘인민의 아들’로 인민의 건강과 복지를 위해, 즉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시장경제를 도입한 사회주의 정치 지도자이다.


"해방되고는 마오쩌둥 주석을 잊지 않고, 부자 돼서는 덩샤오핑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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