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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 STOCK/금융공부finance study

주식의 시작 주식의 시초 주식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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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주식의 시초




*고대 로마 기원전 2세기에는 퍼블리카니(Publicani)라고 하는 조직(주식회사와 비슷한 형태)이 있었다.

 

이 조직은 일종의 법인체로 로마정부로부터 조세의 징수와 신전건립 등의 업무를 계약을 통해 위임, 위탁 받은 조직이다.

 

그들은 단순히 징수업무를 대리한 것이 아니라 조세를 징수하여 이문을 남기는 사업자로, 로마 의회에서 입찰을 통해 조세징수권을 부여받았으며 수시로 재무제표를 공개해야 했다.

 

파르테즈(Partes)라는 주식(수익분배청구권)을 발행하였으며 개인간의 양도가 가능하여 가격이 형성되고 투자의 대상이 되었다.


파르테즈는 다시 대주주 보유지분인 socii와 소액주주 보유지분인 Particulae로 구분됐다.


당시 주가수준이나 주식시장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주가 변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록은 남아있다. 키케로는 자신의 기록에 '고가 주'라는 단어를 쓰면서 "부실한 퍼블리카니의 주식을 사는 것은 보수적인 사람이면 피하는 도박과 같다."고 말했다.




그 이후 

 

*이탈리아 도시국가 시대 중세 물물교환시대에서 초기증권시장으로의 변화가 일어났다. 


13세기 중반, 베니스에서 도시국가 채권 발행과 유통시장이 등장 했다.


14~15세기 이후 플로렌스, 피사, 베로나, 제노바까지 확산되고 도시국가 중심으로 채권, 주식이 발행되어 근대 자본주의 체제구축의 기폭제가 됬다.


15세기 독일 라이프치히 장외시장에서 광산주식거래가 일어났다.


16세기 프랑스, 유럽 최초의 정식인가 거래소를 설립했다.





본격적인


*근대적 주식회사의 시작 


15세기 후반부터 항해술의 발달로 ‘대항해시대’의 개막되어 유럽의 배들이 전 세계를 탐험하고 항해하게 되었습니다. 항해를 통해서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중에서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중국의 향신료, 차와 도자기는 인기품목이었습니다.


유럽인들에게 값비싼 제품들이었고 큰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상품인 만큼 교역에 따르는 위험부담도 컸습니다. 


당시 동남아의 패권을 쥐고 있던 스페인과 포르투칼이 몰락하고, 신흥 해양대국의 기치를 내건 영국,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이 신대륙과 동남아 등지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에 네덜란드의 상인들은 대형선단을 꾸리고자 하지만 왕실의 재정만으로는 충당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로서는 아주 기발한 생각으로 네덜란드 국민모두에게 투자를 받기로 합니다. 

하지만 투자자가 많았기에 소유의 구분과 이익의 배분 등에서 문제가 발생하였고 이를 해결하고자 자본금이라는 개념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 자본에 대한 소유를 증명하는 증서가 탄생하게 되는데 그 증서가 최초의 주식인 바로 동인도주식회사의 주식이 됩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교역을 하는 회사들은 한 번 출항하는 비용을 소수의 투자자들로부터 후원받았다.

 

하지만 배의 난파나 원주민의 피습 등 그 교역이 성공하는데에 리스크가 컸기 때문에 많은 투자자들로부터 조금씩 투자를 받아 위험을 분산 시켰다.


그리하여 주식이 탄생하였으나 교역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고 투자금을 반환받는데 시간이 오래걸려 사람들은 불안해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주식을 팔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이익을 얻으려 주식을 사고자 하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주식을 사고파는 사람이 많아지고 먼 지역에 따로 살고 있어 어디서 어떻게 만나서 거래를 할지 불편이 생기게 됩니다. 그 불편을 해소하고 편리하게 거래를 하고자 생긴 것이 최초의 증권거래소(주식시장)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 입니다.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가 인쇄된 주식과 채권을 거래할 목적으로 설립하였다.[1] 뒤에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Amsterdam Bourse)로 이름이 바뀌면서, 최초로 유가증권 거래를 공식적으로 시작하였다.


또한 1609년 네덜란드에서 '비셸방크'라는 중앙은행이  설립되었으며 유럽에서 처음으로 생긴 중앙은행입니다.


고객의 예금은 받았지만 이자를 주지 않았고 한 금 가치의 한도 내에서 화폐를 발행 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가 유럽에서 가장 앞선 무역국가 엿고 무역을 하려면 다양한 화폐교환이 필요한데 그 역할을 한 것입니다.


동인도회사가 근대적 주식회사의 시초라고 불리는 이유는 "계속기업"이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권리 증서 발행과 수익 배분은 한 번의 출항과 회항의 1회적 발행이었기 때문에 정산이 끝나면 회사는 해산하였다.

 

하지만 동인도회사는 출자한 자본을 회사에 유지시키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10년의 투자기간 및 5% 이익시 마다 배당"이라는 조건으로 투자자들을 설득하였다.


이러한 동인도 회사의 흥행과 함께 유럽에는 주식회사 붐이 일기 시작했고,

 

발행된 증서(주식/채권)을 상시 거래할 거래소가 필요하게 되었다.


암스테르담은 네덜란드의 수도 입니다.

 

당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는 곡물 상품 시장의 중개소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전문 브로커 길드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암스테르담에 모여 정기적으로 증권을 거래하는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다.


동인도회사의 흥행은 유럽 주식회사 설립의 붐을 일으켰고, 결국 16~17세기 유럽에는 상당히 많은 주식회사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영국의 경우 1689년 명예혁명에 반발하는 프랑스 루이 14세와의 전쟁으로 프랑스산 수입품과 생산물 거래가 금지되자, 그동안 상공업을 통해 자본을 늘려왔던 사람들이 수출입 제한으로 타격을 입자, 대체 수단으로 주식 투자를 시작하면서 주식 시장이 전례없는 호황을 맞이하고 빠른 속도로 성장하게 됬습니다. 


하지만 주식투자의 호황은 주식회사제도의 정착과 몰락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한 가지로는 튤립 파동이 있습니다.


튤립 파동(Tulip mania)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과열 투기현상으로, 사실상 최초의 거품 경제 현상으로 인정되고 있다.


 당시는 네덜란드 황금 시대이었고, 네덜란드에 새롭게 소개된 식물이었던 튤립의 구근이 너무 높은 계약 가격으로 팔리다가 갑자기 가격이 급격하게 하락한 일이 일어났다.


 튤립 파동의 정점은 1637년 2월이었다. 튤립은 숙련된 장인이 버는 연간 소득의 10배보다 더 많은 값으로 팔려 나갔다. 


튤립 파동은 역사상 기록된 최초의 투기로 인한 거품이었다. "튤립 파동" 이란 용어는 이제 거대한 경제적인 거품(자산 가격이 내재적인 가치에서 벗어날 때)을 가리키는 은유로 자주 사용된다.


1630년대 네덜란드에서는 수입된 지 얼마 안 되는 터키 원산의 원예식물인 튤립이 큰 인기를 끌었고, 튤립에 대한 사재기 현상까지 벌어졌다. 꽃이 피지 않았는데 미래 어느 시점을 정해 특정한 가격에 매매한다는 계약을 사고파는 선물거래까지 등장했다.


 1630년대 중반에는 뿌리 하나가 8만7000유로(약 1억6000만원)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가격이 하락세로 반전되면서 팔겠다는 사람만 넘쳐났으므로 거품이 터졌다.


 상인들은 빈털터리가 되었고 튤립에 투자했던 귀족들은 영지를 담보로 잡혀야만 했다.


이러한 파동은 네덜란드가 영국에게 경제대국의 자리를 넘겨주게 되는 요인중 하나 였다.


튤립 버블은 남해 거품 사건(잉글랜드)과 미시시피 계획(프랑스)과 함께 근대 유럽의 삼대 버블로 꼽힌다.


이렇게 시작된 주식시장은 미국에 와서 그 꽃을 피우게 됩니다.


1792년 5월 17일 증권 중개업자와 상인 24명이 모여 월가 68번지 버튼우드(미국플라타너스 나무)아래서 증권 거래방법, 수수료율 등을 정한 협정에 서명한 것을 NYSE(뉴욕증권거래소)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1602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 보다 190년 늦고, 1920년 일제강점기 때 서울에 설립된 경성주식현물거래시장 보다 128년 앞선 것입니다.


화폐가 없던 시절, 은으로 만든 막대 기를 사용, 거래를 시작한 것이 뉴욕증시의 시발점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금액이 작은 물품을 거래할 땐  은 막대기를 8토막으로 나눠 사용했는데 이 전통에 따라 지금도 뉴욕증시에선 주식가격이 소수점이 아닌 1/8단위 로 표기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 주식의 역사



우리나라 최초의 유가증권이 발행된 것은 1897년이며, 1905년에는 국고증권조례에 따라 우리나라 최초의 국채가 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발행된 주식은 발기인이 전액 인수하였고, 국채도 저축은행이 전액 인수하였기 때문에 일반인이 유가증권을 취득하건 거래할 수 있는 기회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 일본자본의 국내 진출이 크게 늘었는데요. 그에 따라 일본인들 간의 자유거래로 초기의 증권거래가 시작되었습니다.


1906년경부터 일본인과 거래하게 된 우리나라 사람들도 주식을 자산축적이나 금융거래의 수단으로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1908년경에는 서울에 처음으로 주식매매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주식현물점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1909년에는 우리나라 사람이 개업한 주식현물점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증권업은 이때부터 장외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실질적인 주식 거래가 시작된 것은 일제 강점기다. 하지만 현대적 형태의 증권거래소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56년 당시 재무부의 주도로 설립된 대한증권거래소였다. 


그해 3월 3일 증권거래소 서울시장(당시 명동 소재)에서 처음으로 거래가 이뤄졌다. 개장일에 상장된 종목은 조흥ㆍ저축ㆍ상업ㆍ흥업은행 등 4개 은행과 경성방직ㆍ대한해운공사ㆍ대한조선공사 등 8개 기업, 총 12개사에 불과했다. 건국 국채 3종도 함께 거래됐는데, 당시 주식투자가 생소하다 보니 초기 증권시장에서 주식과 국채의 거래 비율은 반반 정도였다. 


당시 주식 거래는 모두 수(手)작업으로 이뤄졌다. 거래소에 모인 중개인들이 호가를 내고, 거래소 직원이 격탁(擊柝·거래 체결 등을 알리는 데 사용한 물건)을 두드려 가격을 결정했다. 주식 매매 주문은 전화를 통해 증권사 본ㆍ지점을 경유한 뒤 거래소로 주문이 전달됐다. 고객은 주문 후 거래가 체결됐다는 소식을 듣기까지 1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지금은 HTS(홈트레이딩시스템)나 인터넷을 통해 주가를 실시간으로 조회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주가를 칠판에다 직접 적었다. 종목별 거래 상황은 매매계약이 체결될 때마다 거래소 방송을 통해 공지됐다. 


구멍가게 수준이던 주식시장은 초창기에는 기업들이 상장을 꺼리기도 했다. 특히 군사정부가 집권한 1960년대에는 상장을 하면 기업을 빼앗길 수 있다고 걱정하는 기업인도 없지 않았다. 


이에 따라 박정희 대통령 정부가 들어선 뒤 전환기를 맞았다. 당시 정부는 증권시장을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조달 수단으로 키우기 위해 적극적인 증시 육성 정책을 펼쳤다. 


1968년 '자본시장육성에 관한 특별법'과 결정판은 72년 이뤄진 ‘기업공개 촉진법’이었다. 일정 요건이 되는 기업의 상장을 의무화한 이 법이 시행되면서 상장 러시가 시작됐다. 70년 48개에 불과했던 상장사는 78년 356개사가 됐다. 주식거래대금 역시 이 기간에 429억원에서 1조7415억원으로 40.6배 불어났다. 


당시 증시를 주도한 건 중동건설 붐을 탔던 건설주. 하지만 오일쇼크와 경제성장 둔화 속 건설주는 1년새 70% 이상 폭락하는 이른바 ‘건설주 파동’을 겪기도 했다. 


증권거래 업무도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78년 기존 격탁매매 방식이 폐지되고 육각형 모양의 단상(포스트)에서 거래가 이뤄지는 ‘포스트 매매’가 등장했다. 이듬해에는 증권거래소가 명동에서 여의도로 이전한다. 칠판을 대신한 전자식 시세 게시판이 등장했고, 증권사들도 여의도로 둥지를 옮기면서 여의도는 한국 자본시장의 메카로 자리잡게 된다. 


1980년대에는 포항제철(현 포스코)ㆍ한국전력ㆍ국민은행ㆍ전기통신공사(현 KT) 등 국가기간산업이나 공공성이 높은 기업들의 주식이 국민주 형태로 보급되면서 대중화 시대를 맞는다. 온라인거래의 기틀도 이때 닦였다. 83년 2월 증권 온라인시스템이 가동에 들어갔고, 86년부터는 기존까지 전화 통화를 통해 이뤄지던 매매를 컴퓨터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후반 저금리ㆍ저유가ㆍ저원화가치 등 이른바 ‘3저 호황’에 힘입어 89년 3월 31일 주가지수는 1000포인트 고지(1003.31)를 밟게 된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후 주가가 급락하자 정부는 ‘12·12 증시부양책’을 내놓았다. 역사상 가장 강도 높은 부양책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투신사 부실을 불러오고 깡통계좌를 양산하는 등 부작용이 더 컸다.


92년에는 외국인 직접투자를 허용하면서 증시의 선진화를 추진했다. 당시 외국인 투자 한도는 일반기업은 10%, 공공기업은 8%였다. 98년에는 핵심 기간산업을 제외한 대부분 기업의 외국인 취득한도가 폐지되면서 한국 증시는 본격적으로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90년대에는 상장법인의 해외 상장도 이뤄졌다. 94년 포철과 한전이 미국 증권시장 공모를 통해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됐다.


하지만 한국 증시는 1997년 외환위기라는 최대 위기를 맞는다.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과 금융회사의 방만한 대출관행 등이 원인이 돼 한보ㆍ삼미ㆍ기아 등 굴지의 기업들이 잇따라 쓰러졌다. 종합주가지수도 280까지 추락했다. 이는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성과가 나타나면서 주가는 다시 치솟기 시작했다. 90년대 후반부터는 벤처기업 투자 바람이 불면서 코스닥 투자 열풍이 불었다. 6개월 사이 주가가 70배나 올랐던 새롬기술 등 급등 종목이 속출했다. 하지만 2000년 들어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개인투자자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주었다. 코스닥지수 최고치는 2000년 3월 기록한 2834. 11년이 지난 현재 코스닥지수는 당시의 5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한국 증시는 2003년부터 대세 상승기에 접어든다. 적립식 펀드 투자 열풍이 불며 개인들의 자금이 증시에 유입됐다. 펀드는 이후 외국인들의 매도공세를 받아주는 증시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다. 주가지수는 2007년 4월 1500선을 넘어섰고, 그해 10월 2000선을 돌파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1000선 아래로 떨어지기도 했지만 지난해 다시 2000선을 회복한 상태다. 


1992년 증시 개방 때만 해도 변방에 머물렀던 한국 증시는 이제 세계 10위권의 증시로 발돋움했다. 아직까지 선진국 증시라고 분류하기에는 '2%' 부족한 면이 있다. 하지만 2009년 세계적 권위의 FTSE 선진국 지수에 편입될 정도로 국제무대에서 대우받고 있다.








시기별 인기 업종을 살펴보면 한국 경제의 발전상이 한눈에 드러난다는 점도 한국 증시의 특징이다. 70년대에는 개발경제 속에 현대건설ㆍ대림산업ㆍ한일개발 등 건설업종이 국내 산업을 선도했다. 80년대에는 수출업이 주력산업으로 부상하면서 현대자동차ㆍ삼성전자ㆍ유공ㆍ금성사 등이 각광을 받았다. 이처럼 증시 도약기에 건설업종과 수출업종이 주류였다는 점은 한국 경제가 개발과 수출 위주로 발전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90년 이후에는 기존 건설ㆍ수출업종의 인기가 여전한 가운데 증권ㆍ은행 등의 업종이 부각되면서 선진국과 비슷한 증시 구조를 갖추게 된다. 이른바 무역ㆍ건설ㆍ금융업종이 ‘트로이카주’라는 테마를 형성하며 증시를 주도한 때도 이 무렵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포스코ㆍ현대중공업ㆍ삼성중공업ㆍ대우조선 등 세계에서 경쟁력을 검증받은 기업과 SK텔레콤ㆍNHN 같은 IT기업이 주도주 대열에 합류했다.


수퍼개미의 원조는 ‘백 할머니’로 불렸던 고 백희엽씨다. 그는 한국전쟁 때 무일푼으로 월남해 페니실린·군복 장사를 하면서 돈을 모았다. 1950년대 후반 건국채권에 투자해 거액을 벌어들이면서 ‘큰손’으로 떠올랐다. 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주식에 투자한 백 할머니는 우량주를 2~3년씩 보유하는 장기투자 원칙을 고수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에는 천문학적 액수인 300억~400억원 정도를 굴린 것으로 알려졌다. 


‘광화문 곰’으로 불렸던 고 고성일씨도 빼놓을 수 없다. 80년대 초반 하루 전체 주식거래 규모 100억원 가운데 약 30%가 그의 계좌에서 나왔을 정도로 증권가를 휘어잡았다. 저평가된 주식을 대거 사들이는 이른바 ‘물량떼기’가 주특기였다. 그의 별칭은 손해를 보고도 끈질기게 주식을 사 모으는 투자스타일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그는 사양길로 접어든 건설주를 집중적으로 매입했다가 큰 손실을 보고 주식시장에서 손을 뗐다.


80년대 활동했던 ‘헨리 정’이라는 투자자도 입에 오르내린다. 국내 증시에서 이른바 ‘씨말리기’라는 작전 수법을 처음 선보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호재가 있는 특정 종목을 집중적으로 사들여 유통 주식수를 줄인 뒤 주가를 올리는 수법을 구사했다. 


90년대 후반부터는 선물시장에서 수퍼개미들이 주로 활약했다. ‘압구정 미꾸라지’로 불렸던 윤강로(현 KR선물 회장)씨가 대표적이다. 윤 회장은 선물시장에서 위험을 잘 피해간다고 해서 미꾸라지라는 별칭을 얻었다. 98년부터 선물투자를 시작해 종잣돈 8000만원을 1300억원으로 불린 것으로 유명하다.


이외에도 대신증권 목포지점 영업부장을 지낸 ‘목포 세발낙지’ 장기철씨, 미래에셋자산운용 주식운용본부장 출신인 ‘수퍼 메기’ 선경래씨, 전북 전주의 큰손 투자자로 알려진 ‘전주투신’ 박기원씨 등이 ‘재야 고수’로 이름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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